蓬山君 炯信

蓬山君 炯信 [1603(선조36)-1682(숙종8)]

휘는 형신(炯 信),자는 여우(汝友),

귀천군의 3남이다.귀천군이 광해군때 목숨을 걸고 오직구국일념으로 금산군 성윤등 종친 19인의 소두 로서 참소를 올리다가,먼리 남쪽 변방 순천으로 귀양을 갔는데,그해 공의 나이 15~16세 였다.
공은 항상 두려워하며 조심하여 회를 입을 만한 일은 누추기를 지극히 하였고, 그해 봉산수로 초수 되였다.
1621년(광해군 13) 부친이 귀양에서 풀려나 공의형제 5인이 정성껏 봉양하여 이름있는 날과 명절마다 채색옷을 입고 잔을 드리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부러워하고 칭찬 하였다.
1649년(인조 27) 인조대왕의 대상때 혼전의 제관이 되였고 1651년(효종 2)영은전의 제관 공로로 봉산도정에 올랐다.
1659년(효종 10) 효종대왕의 혼전 제관에 선임 되였는데 공경하고 삼가하여 예의를 잃는 일이 없었다.
1661년(현종 2) 경모전 제관의 공로로 정의대부에 올라 봉산군에 봉군되였다.
1662년(현종 3) 현종대뢍의 온천행사가 있을 때마다 도총부 부총관 주원 제조로 한결같이 수행 하였다.
1673년(현종 14)에 임금 이 이미"계급을 올리라"명령 하였는데,이때 대신 이상진이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봉산군은 고 귀천군의 아들인데 그의 아들 돈이 바야흐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다."고 하였다.
1681년(숙종 7)공의 3남 돈이 대과에 급제하여 지평이 되였는데 이때 공의 연세가 79세 였다.
공의 처음 수(守)는 관례에 따른것이고 차례로 평탄하게 품계가 올랐으며 혹은 공로로서 상을 받기도 하였다.
70세에 주의 대부에, 또 9년후에 승헌대부에 오르고 ,또 1년이 지나서 1682년(숙종 8) 80세로 가덕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간에 오르니 은혜로운 영광이 이에 이르렀다.
배위는 두분인데 증 군부인 청주 한씨는 가선 군수 형의 딸이고, 증 군부인 청주 한씨는 판관 득일의 딸이다.
묘갈명이 있다.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봉산군묘소입구

봉산군묘소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