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肅公之 忠節

忠肅公 龜川君 [1569(선조2)-1645(인조23)]

휘는 수(),자는 명원(明遠),시호는 충숙(忠肅).

덕양군의 손자이고 풍산군의 차남이다.

1583년(선조16) 15세때 귀천부정(龜川副正)이 되었다.

24세되던1592년 임진왜란때 파천하는 어가를 뒤쫓아 서도(西道) 행재소에나가 선전관에 제수되고 명을 받들어 함경분조로 나아가 이듬해 환도 할때까지 배위의 임무를 다하니 공의 충근을 모두가 우러렀다.

왜란중 선원록이 흩어져 학식깊은 종영으로 하여금 다시 편찬 하게 할때 공이 뽑히여 이를 주관 하여 1604(선조37)에 완성하여 그공으로 명선대부에 올랐다.

1611년(광해군3)에 부친 풍산군이 별세하자 3년시묘를 하고 탈상함에 귀천군(龜川君)에 봉해지니,그때춘추 46세였다.

1606년 선조대왕이 재위41년에 승하 하자 세자 광해군이 보위를 이었다.

그후 적신 이이첨(1560-1623)무리 들의 간계로 모역의 죄를 씌워 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이고, 국구 김제남을 사사하고 끝내 는 인목대비를 폐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옥사뒤 에서 간적들은 사당을 조직하여 그에게 아첨하는 동류로 채워 스스로 토역의 충신 이라며 나라일을 함부로 하여 종사의 위태로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공은 1617년 (광해9)정월 초4일 분연히

우리는 종척 으로서의 의리상 나라와 함께 망할 참인즉 말은 않고 죽기 보다는 차라리 말을 하다가 죽으리라.
하고 금산군 성윤등 19인을 거느리고 앞장서 소를 올리어 간적 이이첨을 논척하니 신명을 돌보지 않고 간적의 권세에 맞서 종사를 구하려 한 대절 (大節)이었다.

충신 의사도 직언하면 당장에 미칠 멸족의 화를 경계하여, 형제간에도 말이 이이첨에이르면 입을 가리고 손을 내저을 당시에,

더구나 종척은 국정에 간여할수 없도록 엄격히 규제된 당시에,"종사의 위망을 보고만 있을수 없다" 하며

"오늘날 삼사가 전하의 삼사입니까?이이첨의 삼사입니까? 간적을 내치시어 종사를 안정케하시고 ,국가의 기강인 삼사의 악당을 다스리소서."라고 한 정사소는 우국 충정의 극간이였다.

이 소에 당황한 간적의 삼사가 벌떼같이 일어나 공을 국문 할겄을 여러차례 제청하였으나 광해군은 순천에 정배할것을 허락하니 공은 그날로 출성시를 읊고 떠났다.

순천배소에서 1년쯤후에 성북쪽 대래곡으로 옮기여 손수 초가 한칸을 얽어 서 망북정이라 하고 아침저녘으로 향북 망배하다가5년후인 1621년(광해13)6월에 귀양에서 풀려 났다.

1623년(인조1)인조반정에 먼저관직을 회복하고 두품계를 올려서 사옹원제조와 종친부유사로 중용되였다.

이괄의 난이나 국왕이 공주로 피난할 때 호종 하였으며,정묘호란 때 또한 어가를 강화도로 호종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올랐다.

1645년(인조 23) 11월 21일 별세하니 인조 대왕은 놀라 슲어하며 조제를 하사하고 현록대부로 증직 하였다. 1665년(현종6)12월 27일 충숙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배위 군부인 동래정씨(1568-1635)는 사도 첨정 증 승지 인수의 딸이다.

묘갈명과 유고집 망북정유사 ,신도비명,추모비가 있다.전남 순천시 용당동 33번지 에는 충숙공 망북정 유지비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귀천군 망북정 유지비



귀천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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