滄洲公之 文行

창주공(滄洲公) 봉래군(蓬萊君)[1593(선조26)-1660(인조23)]

휘는 형윤,자는 여승 호는 창주.덕양군의 증손이며 풍산군의 손자로 귀천군의 장남이다.

시서에 힘써 널리 경사를 보는데 한번 보면 잊지 않었다.여러가지 기예에 두루 능햇는데,더욱 바둑을 잘두어서 12-13세 때에 국수가 되었다

. 1612년(광해4)과 1613년(광해5) 두번이나 종시(宗試:종실에게 보이던과거)에 장원으로 급제 하였다.

처음 봉래수를 제수 받었고,다시 승진하여 명선대부,정의대부가 되여 군에 봉해 졌다.

공의 나이 겨우 약관에 오성 이항복과 일송 심희수가 시관으로서 공에게 탄미 하기를 "종실중에 영재가 나왔다"하였다. 이때 일송이 공에게"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라."고 권하니, 이로부터 더욱 서적 속에 힘을 쏟아서 게을리 하지 않었다.

공은 또한 산수를 즐겨 친분있는 선비들과 함께 동해바다 및 금강산을 두루 여행하고 <유금강산기(遊金江山記)>란 명문을 남기어 당시 시단의 상장인 동명 정두경이 평하기를 "극히 아름답다고."고 하였다.

1615년7월27일서울을 출발하여 8월26일 돌아 올 때 까지 일 개월 간의 금강산 기행문은 공의 문집 <창주집>에 수록 되어 있다. 훤히 보이는 듯하게 묘사된, 시인의 필치가 돋 보이는 명문이며, 당시 선비의 풍류와 시대 배경을 여행담으로을 볼수있다.

부친 귀천군이 순천에 귀양가있을때,새벽과 저녁으로 모시고 받들며 위로해드렸다.약과 음식으로 병환이 나기전에 먼저 치료해드려 무사히 귀양에서 풀려 드러 오게 하였다.

또 인조 반정으로 귀천군의 벼슬이 두품계가 올라 영화가 여러 종실에 넘쳤으니 ,이는 공의 효성의 결과 이였다.

1624년(인조2)에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임금을 따라 공산에 이르렀다가,임금이 환궁하자 그 공으로 벼슬을 올리고 말을 하사하여 수고로움을 보답 하였다.

1627년(인조5)호란 때에는 임근을 모시고 강화에 갔었고,그공으로 중의대부 봉래군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올랐다. 1700년(숙종26)3남 무(무:莊靖公)의 추은으로 승헌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증직되었다.

문장과 행의(行宜)로 일세의 추앙을 받았다.시단에 있어서도<기아(箕雅)>와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올랐다.

배위 현부인 전주최씨(1590-1671)는 영월군수 행의 딸이다. 묘갈명이 있다. 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