駱溪公之 斥邪

駱溪公 무()[1821(광해13-1703(숙종29)]

이식의 문인이다.
1651년(효종2)에 사마시에 합격, 1653년(효종4)에 알성문과 병과에 합격하여 괴원에 뽑혀서 곧 설서가 되고 이어 한원에 드러가 검열이 되였다.
그 후 대교 봉교겸 설서 전적을 거쳐 예조 병조의 정랑으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충청도 도사가 되고 다음해에 병랑 사서 정언 문학을 역임 하였다.
1659년(효종10)에 병조 정랑으로 있을때 상서를 올려 북로의 백성들이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음을 조목조목 나열하여
비답하기를 "가상 하도다."하고,조정에서 다 청하는대로 시행 하게 되니,
북도백성이 힘을 입게 되였는데 얼미후 파직 되였다.
1660년(현종1) 서용되여 지평이 되였다.
겨울에 뇌성이 들리자 임금에게 차자를 올려 경계할것을 힘을 다하여 직언 하였으니"하늘에 감응 하는 이치가 실로 덕을 닥고 반성 하는데 있읍니다.
닦고 반성하는 방법은 간하는 말을 받어 드리시고 어진사람을 쓰는 일은 바깥에 있는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효종대왕이 승하 후 모후인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남인과 서인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송시열 등 서인이 1년설을 주장하여 이것이 채택되자, 남인 윤선도가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 때 공은 지평으로 있으면서 윤선도를 탄핵하였다.
1661년(현종2) 다시 병조와 예조의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 옮기고 다음 해 송도 소윤을 배명맏고, 그 다음 해 다시 사현부 장령으로 들어왔으나 이 해에 옛 병환이 도져서 집에서 몸 조섭을 하였다.
1665년(현종6) 다시 남인의 거두인 허적의 잘못을 따지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광릉 송추 아래에서 두문불출하였다.
1666년(현종7)에 성문밖까지만 내쫒는 가벼운 형벌로 감형되었고, 1667년(현종8) 용서를 받아 등용되었다. 풍덕부사·한산군수로 전임, 1671년(현종12)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 태상정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그 후 종부정'헌납이 되었다가 다시 종부시로 들어가니 10년동안 금고를 당하면서도 임금의 은혜를 입음이 빈번하였으니 조정에서도 치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해 정월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산릉도감 청랑에 뽑혔느나 병환으로 사임하였고, 사간·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보덕으로서 집의가 되었다.
숙종 초기에는 사간이 되어 성학 권장, 훌륭한 인재의 선발, 언로 개방, 선비 양성, 둔전제 폐지, 군정 개혁 등을 역설하였고, 또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인용하여 선조에서 견책받은 모든 신하들의 죄를 용서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현종대왕이 승하하자 이조정랑이 당하관의 반열을 압도하려 하므로 공이 그 부당함을 지적 통박하여, 비록 슬프고 창황한 중이지만 체계는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말로 "체계를 얻게 되었다'하였다.
이 때 영남인 곽세건이 간당에 앞장서서 소를 올려 사류를 일망타진하려 하니 공이 사간으로 홀로 임금꼐 아뢰어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또 극론하였더니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고 하여 체직되니 간당들이 세력을 펴게 되었다.
공은 서울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아서 양주 장리에 ㅈ비을 짓고 '둔길'이라 써붙이고 그 뜻을 나타냈다.
1680년(숙종6)에 시사가 일변하여 곧장 기용되어 사성이 되었다가 사간으로 옮기었다. 그 후 호조·공조참의, 승지등을 역임 후 또 공조참의를 배명받았다.
1689년(숙종15) 공이 69세때 시사가 크게 변하여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고 숙종대왕 계비 민씨가 폐출되었다.
그 후 두문불출하여 인사를 사절하였다.
1697년(숙종23) 정월 대신이 임금께 아뢰어 공이 "세 조정 3조(효종·현종·숙종)의 근시로서 나이가 80에 가까운데 우대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은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진시켰는데 이는 전에 없던 일이다.
2월에 동지중추부사를 거처 호조참판으로 옮기고 특진관에 뽑혔다.
1700년(숙종26) 2월 연신들이 또 " 공은 효종대왕 때의 한림으로 나이가 80세이오니 마땅히 우대의 은전이 있어야 한다."고 서로가 아뢰자 임금이 명하여 두 계급을 뛰어넘어 자헌대부의 계급을 더하여 지돈녕부사에 임명하였다.
계속하여 기사에 참여하였으며, 내섬시 제조 겸직을 배명받았다. 글씨에 능하기도 했다.
1703년(숙종29) 5월21일 성동 구제에서 별세하니 향년 83세였다.
1761년(영조37)에 시호를 '간숙·장정·정간'으로 올렸다가 1788년(정조12)에 장정으로 결정, 5월에 현손 동직의 집에서 시호를 받았는데 이조정랑 성덕우가 와서 선포하였다.
배위 증 정부인 전주최씨는 정사공신 판서 완천군 증 영의정 내길의 딸이고, 배위 정부인 청주한씨는 석중의 딸이다.
신도비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