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泉公之 淸雅

文泉公 돈( )[1642(인조20-1713(숙종39)]

자는 진오, 호는 문천·수묵재. 봉산군의 3남으로 1672년(현종13)에 별시병과에 합격하여 한림·삼사·사검을 두루 거쳐 1688년(숙종14)에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올랐다.

1695년(숙종21)에 충청감사로 나갈 때에 임금이 내린 교문에

"왕은 말하노라.····(중략) 조정에서 우뚝하게 서서 재상과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하였도다.

석랑의 직책에서 물러나 오화의 직에 올랐고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는 6판서의 반열에 올랐도다.

그러나 여러 번 상전과 창해가 바뀜에 따라 귀양살이와 불안한 생활을 겪었고 북쪽 변방의 진영을 한번 지휘하여 풍상에 시달리는 외로움을 모면시켜 주었도다.

예조참판에서 벼슬을 그만 둘 뜻을 비치기도 했으며 비록 대소장단에 알맞지 않는 데가 없었으나, 혹은 안팎의 가볍고 무거운 일로 반대도 있었다.

때문에 수령 직을 지내기에 감사의 직책을 제수하였노라.

이에 경에게 중직을 주니 경은 그 능력을 다하여 그 직분을 다할지어라." 라 쓰여있다.

이로 미루어 공의 험난하였던 편린을 짐작할 수 있다.

1709년(숙종35)10월에 형조판서 11월에 대사헌, 1710년(숙종36)3월에 의정부 우참찬,
9월에 예조판서, 1711년(숙종37)3월에 이조판서, 7월에 또 예조판서,
9월3일에 당년 70세로 기로소에 들어가고, 같은 달 다시 우참찬,
10월에 이조판서, 12월에 한성 판윤, 1712년(숙종38)1월에 예조판서,
2월에정시 시관, 5월에 다시 예조판서로 옮기었고,
12월에 아산으로 유배되어 다음 해인 1713년(숙종39) 1월22일에
끝내 파란만장한 벼슬길을 뒤로 하고 별세하니 향년 72세였다.

배위 증 정부인 칠원윤씨는 태기의 딸이고, 배위 정부인 순흥안씨(1649~1717)는 응회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