市隱公之 扶宗社

市隱公 기익(翊) [1654(효종5) ~ 1739(영조15)]

자는 국필, 호는 시은, 시호는 양정. 장정공 무의 3남이다.

총명함이 뛰어나 6세에 관학에 취학하였는데 예조판서 김좌명(1616~1671)이 매양 기재(奇才)라고 일컬었다.

1675년(숙종1)에 우암 송시열이 북관으로 유배되자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그만두고 오직 경사에만 유의하다가 경신 대출척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할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1687년(숙종13)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94년(숙종20)에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우암의 신원을 위한 상소를 올리자 왕이 이를 가납하였다. 2년 뒤 문음으로 참봉에 기용되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가 친정으로 가고 우암이 귀양가서 있는중에 사약을 받게 되자 제생과 함께 대궐을 지키며 호읍하였다.
1696년(숙종22) 침랑을 배수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물러났다.
1701년(숙종27) 장악원 주부에 임명되었고, 공조의 낭으로 전임되었다.
1703년(숙종29) 부평현감이 된 지 몇달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자 다시 공조를 거쳐서 영동현감으로 나갔다.
1713년(숙종39) 60세의 나이로 증광별시 병과에 등과하자 예조좌랑을 배수하고 얼마 후 병조에 전임 후 사헌부 지평을 배수, 양사와 춘방을 거쳐 집의·사간에 이르렀다가 장약원 정3품이 되었다.
1716년(숙종42) 승정원 동부승지를 초배, 좌승지에 이르렀다. 그 후 호조·병조·형조의 참의와 대사간, 판결사를 두루 거쳤다.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강원감사를 제수받은 후 내직으로 옮겼다.
왕세제를 책봉할 때에 예방승지였던 까닭에 가선대부로 올랐다.
1725년(영조1)에 호조참판을 지냈고 그 후 병조·형조참판과 한성부 우윤을 지냈고, 도승지 의금부의 당상을 겸임하였다.
1733년(영조9) 80세에 가의대부에 오르고,
1736년(영조12) 대신들이 선조(효종·현종·숙종)때에 지돈녕공(장정공)의 고사를 인증하여 품계를 바꾸어 품계를 올리게 하고, 또 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공은 충숙공의 증손으로 그 곧음을 포상하고 친족을 돈목케 하는 의리로서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자 임금은 특별히 자헌대부 공조판서르 제수하니, 부자가 잇달아 80세를 넘겨 수직을 받아 모두들 성세의 기로소에 들어가니,
이 때 임금은 영수각에서 배알을 받고 기로소에 든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 하였는데 공도 참여 하였다.

공은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 젊었을 때 암송한 것을 연세가 80세가 되었어도 때때로 생각해 외웠는데 하나도 빠뜨린것이 없었다.
그 평생토록 문사를 자처하지 않았으나, 그 시가 맑고 주옥같았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음영을 폐지하지 않아 지은 시 3천여 수가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는 기록과 유고도 같이 씌어 있는데 현재는 애석하게도 찾아 볼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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