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齋公之 衛斯文

直齋公 李箕洪[1641(인조19)-1708(숙종34)]

초명은기주(箕疇), 자는 여구(汝九),호는직재(直齋),시호는 문경(文敬),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봉산군의 손자로 아버지는 부사과 숙(塾)이며,어머니는 군수 宋鉉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차츰 자라면서 사서아경(四書二經)을 읽었고, 약관이 되기 전에 자신을 위한 학문 즉 경학(經學)과 정치를 하기 위한 학문 에 뜻을 두어 치암(恥菴) 이지렴(李之濂)을 따라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읽었다.

1655년(현종6)에 동춘당 (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찾으니 선생이 진실심지 각고공부(眞實心地 刻苦工夫 )여덟 글자를 써주면서 권면(勸勉)하였다.

또 우암(尤庵)선생을 찾아 학문을 청하자 거경궁리(居敬窮理)의 방법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이에 공은 학문에 힘써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었다.

어버이의 명령으로 억지로 과거를 보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과거응시에 대하여 우암선생에게 물어 답을 듣고 그 가르침을 받은후 당시 사풍이 아름답지 못한것을 보고 드디어 뜻을 결단하고 과거보기를 포기 하였다.

숙종대왕 초에 우암이 소인배들의 모함을 심하게 받음으로 동문여러사람 들과 소를 올려 그 원통함을 호소 하였고, 그가 북관으로 떠날때도 이와 같이 하였다.

경술대출척으로 우암이 용서를 받자 공은 즉시 예방 하였다.

1684(숙종10) 효능참봉을 제수하니 종척의 후예로서 편안히 있을수 없다 생각하여 즉시 나아갔다.이때 라양좌등이 우암을 욕했다 하므로 급히 수천언 으로 소의 초안을 잡아 변명 하려 하였으나 주변의 말류로 실행하지 못하였다.인심과 사풍이 크게 무너 지자 공은 이를 슬프게 여기고 병으로 인해 직책을 그만 두었다.

1689년 (숙종15)에 사포서 별검에 제수 벋었으나 나아가지 않었다.

이때 세도가 크게 변하여 우암이 제주에 위리 안치되고 심지어 국문까지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었다.이에 공은 비분 하여 의리에 차마 잠자코 있을수 없다 하여 집안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이제 사문에 혹화가 이에 이르렀 는데 수십년 동안 가르침을 받은 은혜를 어찌 저버린다 말이냐."하고 동문 40 여인을 거느리고 대궐에 업드려 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함경도 회령으로 귀양갔다.

공이 경성에 이르러 우람이 사약을 받고 별세 하였다는 말을 듣고 목놓아 통곡 하었다.

1691년(숙종17)에 소가 올라 가자 임금은 특별히 공의 이름을 들어 말하기를 "이기홍이 스승을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 한것 이니 죄를 감등 하라,"하여 1694년(숙종20) 4월에 방환 되였다.

1694년(숙종14)에 임금이 크게 각오 하여 곤위를 바르게 회복하고, 우암의 관작을 회복 시키게 하니 비로서 청명해 젔다.

이때 이조판서가 사류중 에서 우암을 위하여 소를 올렸다가 죄를 받고 물러난 사람을 수용 하자 청하니 임금은 "그것은 이기홍을 말하는 겄이냐?"하며 즉시 서용 하게 되였다. 이보다 앞서 1688년(숙종14) 임금은 연신의 말로 말미암아 조정에 명하여"경서에 밝고 행동을 닦는 사람을 천거하여 연석을 갖추어 권강하라."하였는데 공이 여기에 참여한 일이 있다

이때 현석 박세채가 조정에 있었는데 유일을 이끌어 쓰자고 하여, 공이 숙망이 있다고 말 하였고 또 재신의 천거를 입어 시강원 자의에 임명되였다.

그러나 여러번 소를 올려 감당 하지 못할 뜻을 아뢰자 비답을 내리기를 "이번의 신명은 실로 공의에 따른 것인데 어찌 고사함이 이에 이르 렀느냐 조속히 올라와 춘궁에 보도 하게 하라."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러번 내뜻을 말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랴,마땅히 전후의 한말의 뜻을 알아서 사양치말고 올라와 내뜻을 부응하게하라."하였다 .대개 임금의 대우 함이 몹시 두터 웠으나 공은 더욱 두려워 하여 끝내 명령을 받들지 않었다.

1695년(숙종21)에 종부시 주부에 승진 하였으나 사은하고 이내 사퇴,1696년{숙종22)에 서연관에 선발 되였으나 다시 사양 하였다.

얼마 안되어 사헌부 지평에 임명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하고 이윽고 통천 현감으로 나아갔다.

1897년(숙종23)겨울에 방백과의 친척이란 혐의로 사퇴하였다.

1698년(숙종24)승진되어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인주치도에 관하여 여러번 소만 올리고 사퇴 하였다.

1700년(숙종26)에다시 장령에 임명되였으나 이를 사퇴하고, 후에 청풍부사로 나아갔다.

1702년(숙종28)에장령으로 소명을 받자 사직하는 소를 올리고 겸해서 생각 하는바를 아뢰니, 비답이 내리기를 "근심하고 사랑해서 진언 하는 것을 내 몹시 가상히 여기니 어찌 본받고 생각하지 않으랴.'하였다.

그뒤 연풍에 내려가 문산에 수락정을 세우고 살면서 권상하와 함께 경사를 강론하였다.

가끔 화양동등 사문의유적을 찾아 다니며 소일 하였다.

조정에서 여러번 집의에 기용 하고자 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었다.

저서로는 자성편 직제집등 10권이 있다.유집 전후집 30여권중 5권만이 간행되였다.

배위 정부인 반남박씨(1640-1702)는 세훈의 딸로 뛰어난 덕행이 있었다.

묘갈명과 비문이 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엄정면 율능리 560번지이다.

충북음성군 문촌리 에있는 옥산사에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유림에서 춘추로 배향 하고 있다.

직제공 영정 (67세시 진상으로서 화상찬을 장암 정호가 짓고 수암 권상하가썼다.화사는 어진을 그리는 당대 유명 화사다) ··

교지

옥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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